상세내용
수옹 송선생 유기비(睡翁 宋先生 遺基碑)는 1914년 후손들이 우암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의 생애를 기록하여 세운 비로 후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 생가지에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우암의 출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됨.
집마당에 축대를 쌓고 대석과 오석 비신을 세운후 비갓을 얹고, 주위에 보호철책을 둘렀다. 전면에 “(睡翁 宋先生 遺基碑)”라 적고, 후면에 “甲寅五月日立”이라 적고 있으며, 크기는 전고 126cm, 비폭 38cm, 두께 20cm, 비갓폭 88cm, 두께 63cm, 높이 32cm이다. 우암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1574~1628)는 조선인조때 문신으로 광해군9년(1617)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때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유적에서 삭제되어 벼슬길이 막혔었다. 1623년 인조반정때 강릉참봉을 지냈으며, 1624년 이괄의 난때 공주로 왕을 호종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때 화기가 성립되자 분개하여 벼슬을 버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덕에서 이원면 용방리로 내려와 곽씨가에 장가들어 우암송시열을 낳고 기른곳이다.
집마당에 축대를 쌓고 대석과 오석 비신을 세운후 비갓을 얹고, 주위에 보호철책을 둘렀다. 전면에 “(睡翁 宋先生 遺基碑)”라 적고, 후면에 “甲寅五月日立”이라 적고 있으며, 크기는 전고 126cm, 비폭 38cm, 두께 20cm, 비갓폭 88cm, 두께 63cm, 높이 32cm이다. 우암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1574~1628)는 조선인조때 문신으로 광해군9년(1617)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때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유적에서 삭제되어 벼슬길이 막혔었다. 1623년 인조반정때 강릉참봉을 지냈으며, 1624년 이괄의 난때 공주로 왕을 호종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때 화기가 성립되자 분개하여 벼슬을 버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덕에서 이원면 용방리로 내려와 곽씨가에 장가들어 우암송시열을 낳고 기른곳이다.